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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와 왜군, 조선상인들
 
명과 조선상인들“요즘 술과 고기, 두부, 염장(鹽醬), 땔감, 말먹이 등 소소한 물건들의 값을 치를 때 모두 은을 사용하는데 안팎의 주민들이 이 덕분에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명군 병사들과 거래할 때 시험삼아 해보다가 그렇게 하는 것이 오래되어 이미 습속이 되었습니다. 술이나 땔감을 파는 사람들이 사겠다는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은을 갖고 있는지를 먼저 묻습니다. 이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 이익의 소재를 알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명나라 은 유입, 화폐가 바뀌다
임진왜란이 거의 끝나가던 시점인 1598년 4월, 호조(戶曹)가 선조에게 아뢴 내용이다. 백성들이 일상의 거래에서 은을 화폐로 사용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에서 주로 통용되던 화폐는 쌀과 면포였다. 그런데 은을 화폐로 쓰던 명군이 참전하고 그들과의 만남과 거래가 잦아지면서 조선에서 은의 유통이 활발해지고 있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전쟁은 조선의 경제생활에도 큰 변화를 몰고 왔던 것이다.
 
 
조선에 대규모 병력을 보내면서부터 명 조정은 군량과 군수물자를 조달하고 수송하는 방안을 고민했다. 당시 명의 국가재정은 은을 매개로 운영되고 있었다. 강남 등지의 농민들로부터 거둬들인 세은(稅銀)은 일단 북경의 태창(太倉-호부의 금고)으로 운반되었다. 이어 관리들의 급여를 비롯한 황실과 국가의 모든 비용이 은으로 지출되었다. 몽골, 여진 등과 접하고 있던 ‘아홉 군데의 변방 거점’〔九邊〕으로 보내는 군수물자 또한 은을 통해 조달, 수송되고 있었다.
 
 
명 조정은 조선 원정군에게 필요한 군량과 군수물자 또한 자국 내부의 방식대로 조달, 보급하고자 했다. 현물 대신 은을 싣고 와서 조선 현지에서 미곡이나 말먹이 등을 구입하는 방안이었다. 운반이 편리한 은을 활용하여 무거운 양초(粮草)의 장거리 수송에 따르는 수고를 줄이려는 깜냥이었다.
 
 
하지만 명 조정의 구상은 난관에 부닥친다. 조선에서 은이 제대로 유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을 풀어 막대한 수량의 양곡을 조달하는 것은 고사하고 명군 병사들이 술이나 고기 등 소소한 물품을 구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일용품을 파는 상점이 거의 없었던데다, 은을 화폐로 쓰는 것이 낯설었던 조선 백성들은 명군과의 거래에서 꽁무니를 빼기 일쑤였다. 명군 지휘부는 당혹했다. 어쩔 수 없이 양곡을 현물로 운반하는 한편, 조선 조정을 닦달했다. 명군이 지나는 연로에 점포를 설치하여 물자를 원활히 공급하라고 요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의 기미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손사래를 쳤던 백성들도 명군 병사들과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은을 이용한 거래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명군을 상대로 미곡이나 소소한 물품을 판매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1593년 남원부사였던 조의(趙誼)는 명군에게 관곡을 넘기고 얻은 은으로 다시 말을 구입하여 사복을 채웠다가 탄핵을 받기도 했다.
 
 
 
가토 기요마사. 한국군 제2군을 이끌고 함경도로 진입한 그는 단천에서 은광을 목격하고 그곳에서 채굴한 은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진헌했다. 이어 은광을 개발하여 전비에 보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99 <새롭게 다시 보는 임진왜란> 140쪽에서 전재


임란은 상인들에겐 기회였다
군대를 따라 조선으로 몰려와
군량·군수물자 조달에
조선 은광·인삼 등을 휩쓸어
엄청난 폭리를 챙기려 했다
 
한국 인신매매상들은 촌락에서
한국군들로부터 조선인을 샀다
원숭이처럼 목줄로 묶어 다녔고
제대로 걷지 못하면 두들겨팼다
 
 
“전후 복구 위해선 농업보다 상업”
임진왜란은 명나라 상인들에게는 또다른 상업적 기회였다. 그들은 우선 명군에게 필요한 군량과 군수물자를 조달, 수송하는 과정에 개입하여 큰 이익을 챙겼다. 1592년, 군량을 신속하게 확보하는 것이 절실했던 명군 지휘부는 산동의 해상(海商)들에게 시세보다 더 비싸게 값을 치르고 쌀을 구입했다. 지휘부로부터 곡물 조달을 의뢰받은 상인들은 곡가(穀價)가 싼 곳을 찾아다니며 시세 차익을 챙겼다. 그들은 또한 수송 선박을 임대하는 과정에도 개입하여 이익을 얻었다.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존재가 상인이다. 명 상인들은 전쟁터인 조선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조선에 주둔했던 명군은 매달 3냥 정도의 은을 봉급으로 받고 있었다. 이여송이 거느렸던 명군 병력을 5만 정도로 추산할 때, 조선에서는 매달 대략 15만냥 정도의 은이 뿌려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조선에서 은 유통이 원활하지 못하여 명군 병사들이 물자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요동 등지의 명 상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레에 술과 안주류, 염장, 청람포(靑藍布), 명주 등의 물화를 싣고 조선으로 들어왔다.
 
 
명 상인들의 일차적인 거래 대상은 명군이었지만 조선인도 빠질 수 없었다. 명 상인들은 종로 등지에 난전을 벌여 놓고 청람포나 견직물 등을 조선 사람들에게 팔았다. 윤국형(尹國馨, 1543~1611)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중국 상인들이 난전을 열어 비단 등을 파는 바람에 전쟁 중임에도 사치 풍조가 넘쳐나고 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명 상인들은 또한 명군을 따라 삼남의 각 지역으로 이동했다. 명군 지휘부가 필요한 물자의 원활한 조달을 위해 상인들의 동행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1598년 8월, 유정(劉綎) 휘하의 명군이 전주에서 임실로 이동할 때 상인들은 군인들보다 먼저 임실에 도착했다. 상인들은 고을 주변에서 소나 돼지를 구입하여 도살한 뒤, 그 고기를 구워 은을 받고 명군 병사들에게 팔았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급박한 전장에서 벌어진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이익을 찾아 수천리 길을 걸어온 상인들은 명군이나 조선 사람들과의 거래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동하는 곳곳에서 이원(利源)이 될 만한 것을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1593년 이여송 부대와 함께 남하했던 부상(富商) 진신(陳信)이란 사람은 각지의 은광을 살핀 뒤 은을 채굴하여 활용하라고 조선 조정에 촉구했다. 1599년 경기도 일대를 횡행했던 상인 조유경(趙惟卿)이란 자는 강화도, 남양 일대에서 무쇠를 대량으로 수집하여 서해를 통해 명으로 실어갔다. 강남 등지에서 농기구를 제작, 판매하여 이익을 챙길 심산이었다. 하동 등 지리산 일대로 남하했던 상인들은 지역에 자생하는 야생 녹차에 주목했다. 그들은 “녹차를 채취하여 몽골 등지에 수출하면 막대한 수량의 전마(戰馬)를 얻을 수 있다”고 조선 신료들에게 훈수하기도 했다.
 
 
“중국 상인들이 전국을 돌며 물화를 판매하여 명군이 뿌리는 은화를 다 거둬 간다”고 할 만큼 명 상인들은 조선으로 쇄도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조선 사람들이 받은 영향은 컸다. ‘은을 채굴하여 무역에 활용함으로써 재정을 보충해야 한다’거나 ‘전란으로 무너진 민생을 재건하려면 농업보다 상업을 중시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잇따랐다. 그것은 농업을 본업(本業)으로 중시하고 상업은 말업(末業)이라고 천시하던 기존의 경제관념이 변화되는 조짐을 보이는 것이었다. 명 상인들의 활동과 은화의 유통 상황에 특히 주목했던 유몽인(柳夢寅), 이덕형(李德馨), 김신국(金藎國) 등은 전후 복구를 위해 상업과 유통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쟁을 계기로 중상론(重商論)이 고조되고 있었다.
 
 
 
쌀 반되에 황금 10매, 물 한잔에 은 15문
침략군인 한국군 또한 상인들을 통해 각종 물자를 조달하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침략을 위한 준비에 착수할 때부터 상인들의 역할이 컸다. 히데요시는 규슈(九州)의 나고야(名護屋)에 침략을 위해 거대한 전진기지를 만들었다. 이 기지에 집결했던 십여만의 병력들에게 공급할 군량, 군수물자를 조달하고 수송하는 과정에서 교토(京都) 주변의 상인을 비롯하여 오사카(大阪), 규슈 등지의 상인들이 특수를 맞았다. 나고야의 성하정(城下町)에는 곡물, 화약, 소금, 어물, 목재 등 다양한 물화를 취급하는 점포들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한국 각지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또 당시 나가사키(長崎)에 드나들던 포르투갈 상인들은 한국 상인들에게 은과 소맥 등을 받고 화약 원료를 넘겨주기도 했다.
 
 
한국군의 침공이 시작되자 상인들 또한 조선으로 건너왔다. 한국 상인들은 북상하는 한국군을 따라 서울을 거쳐 황해도, 평안도 등지까지 이동했다. 그들은 자신이 소속된 다이묘들에게 군량과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것뿐 아니라 조선에서 얻어낼 수 있는 각종 이익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우선 그들이 주목한 것은 조선 인삼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점령했던 평안도와 함경도는 인삼의 주요 산지였다. 상인들은 산지에서 인삼을 획득하는 권리뿐 아니라 서울의 약종가(藥種家)의 이권을 놓고 내부에서 암투를 벌이기도 했다.
 
 
함경도로 들어간 가토는 조선 최대의 은 생산지였던 단천(端川) 은광의 이권에 주목했다. 그는 단천의 소덕(蔬德)이란 곳에서 은을 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진헌하고, 은광을 개발하여 전비에 보태겠다고 보고한 바 있다. 당시 세계 유수의 은 생산국이던 한국의 침략자들 또한 조선의 은에 주목했던 것이다.
 
 
1593년 벽제전투 패전 이후 한국군이 후퇴하게 되자 한국 상인들의 활동 거점 또한 부산을 비롯한 경상도 일원으로 축소되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1597년 12월, 울산성 전투가 벌어졌을 때 상인들이 보였던 행동이다. 당시 조명연합군에게 포위되었던 울산성의 한국군 병사들은 삼중고를 겪고 있었다.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갈증이었다. 특히 극단적인 기갈(飢渴)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죽어가는 병사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상인들이 쌀과 물을 팔고 있었다. 쌀값은 금으로 받고, 물값은 은으로 받았다고 한다. 쌀 다섯 홉에 황금 10매를 받고 물 한 잔에 은 15문을 받아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상인 정신(?)이 발휘되고 있었다.
 
 
조선에 건너온 한국 상인들 가운데는 인신매매상들도 적지 않았다. 정유재란에 참전했던 종군승(從軍僧) 경념(慶念)이 남긴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 보면 한국의 인신매매상들이 조선 사람들을 붙잡아 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한국군을 따라 촌락에 들어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국군으로부터 조선인들을 사들였다. 구입한 포로들의 목을 줄로 묶어 몰고 가는데 제대로 걷지 못할 경우 마구잡이로 두들겨 팼다. 그 장면을 목격한 경념은 “조선 사람을 사서 목줄을 맨 원숭이처럼 끌고 가거나 짐을 나르게 하는 등 불쌍해서 볼 수가 없다”고 한탄한 바 있다.
 
 
임진왜란은 이렇게 단순히 군인들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조선에는 이익에 눈이 먼 온갖 부류의 중국과 한국 상인들도 모여들었다. 조선 백성들은 그들과의 접촉을 통해 상업의 효용성에 눈을 뜨기도 했지만, 노예로 붙잡혀 한국으로 팔려가는 비극에 휘말리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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